イェダりんの“リベルテ”を探して!

雨宮処凛さんのコラムマガ9学校のゲストとしてもお馴染みのイェダりんことイ・イェダさんの連載コラムが、フランスから届きました! 果たして「亡命者」の日々は、楽しいのか? 大変なのか? そのリアルな生活を綴ってもらいます。コラムは、ハングルも同時併記していく予定です。
*ちなみにリベルテ(liberté)とは、フランス語で「自由」。フランス共和国の標語である「自由、平等、友愛」(Liberté, Égalité, Fraternité)の一つであり、その起源はフランス革命にあります。

(その2)

難民申請当時に出会った
エマニュエル先生

エマニュエル先生と学生たち

 難民認定が下りる前、パリに来ていくらも経たないときに「ホームレス」として暮らした時期があった。
 韓国を離れる前は、最悪の場合は野宿をすることも考えていたし、支援団体と出会うまでは、実際に道端や公園で一夜を過ごすこともあったが、パリの夏は東京やソウルとはまったく異なるものだった。

 初めて野宿をした日、パリの天候や昼夜の寒暖差についてはあらかじめ調べていたにもかかわらず、強風のせいで体感温度が低く、予想より寒くて当惑した。屋根のある暮らしをしている今となっては、パリの夏が韓国の夏よりも快適に感じられるが、野宿をしていた当時はすごくつらかった。風に吹かれない場所を探せばなんとかしのげるが、それでもすごく寒かった。路上生活はすべて合わせて1週間足らずではあったが、いくら夏だからといってコート1枚だけを掛けて公園のベンチや道端で眠った私も無謀だった。結局、パリに来るとき母が持たせてくれた50万ウォン(当時約350ユーロ)を使って、パリ近くの韓国人民泊で2週間くらい過ごした。

115のシェルターで生活していたとき

 その後、難民支援団体である「FTDA」を探して、彼らがわかりやすく整理してくれた難民申請の「進行手続き」を読んだ。手続きの第一段階で必要になる一時居住地をFTDAが手配するのにひと月の時間を要することを知り、申請自体に相当の時間がかかることが予想された。民泊で滞在できる期間が終わろうとするころ、FTDAから「居住地を探せない場合に連絡してみなさい」と指示された「SAMU Sociale」(以下115)に連絡をとろうと、115番に電話をしてみた。ここに電話をすれば、路上生活者、難民申請者など、住まいがない人はシェルターの提供を受けることができる。寝る場所を得るために聞かれることは名前、生年月日、国籍程度。在留資格がどうなっているかなどは聞かれない。115には数多くの利用者がいるので、毎朝早い時間に電話をかけなければならない。いつも約1時間におよぶ長いクラシック音楽の待機音を聴かされて初めて電話がつながる(今もこのピアノの待機音を聞いたら当時の記憶が浮かんでくる)。
 115が本当に行く場所の無い人たちの最後の手段だということは、初めてそこを訪れたときに感じた。広い空間ではあるが、二段ベッドが並んだ一つの部屋に、約300人が一緒になって寝るせいで、口げんかのような小さな揉め事も起きた。シェルターに行くためには指定された時間に来るバスに乗らなければならないなど不便さもあったので、115の存在を知りながらもテントを張って森で暮らすことや、道端で寝ることを選ぶ人たちもいる。

115のシェルターに向かうバス

 私は、可能であれば働きながら難民申請手続きを行いたかった。しかし、難民申請者たちには更新可能な1カ月もしくは3カ月単位の臨時在留証が与えられはするが、就労は認められておらず、合法的に働くことは不可能だ。非合法的に働くことで難民申請に不利益を被るリスクは作りたくなかったし、野宿するには外が寒くもあったので、結局は115でお世話になることにした。
 仕事もなく知人もいないなか、フランスで生きていくためには言語が何より重要だと思い、毎日をフランス語の勉強にあてながら過ごした。そんなある日、エマニュエル先生に出会うことができたのだ。
 ある社会福祉所でのことだったが、当時エマニュエル先生はその社会福祉所の大きい部屋を借り、難民申請者たちに一定期間フランス語の授業を行おうとしており、ちょうどそこにいた私は授業に申し込んだ。

エマニュエル先生と偶然に出会った場所、社会福祉所‘Antenne jeunes’

 いっしょに授業を受けていたのは、チェチェン、イラン、アフガニスタン、ネパール、バングラデシュ、ナイジェリアなどのさまざまな国の人たちだったが、教える人がフランス人だけに授業はフランス語で進められた。フランス語をまったくできないのにフランス語で進められる授業だなんて…。
 正直、はじめは大きな期待もしなかったが、韓国から持ってきたフランス語の教材を併用しながら授業を受けてみたら、これが意外にも大きな効果を発揮した。授業を受けて1~2カ月がたったころには、フランス語で会話をしようと努めることができていたし、もう少したつと書類作成のためにフランス語を使って渡り歩くこともでき始めていた。おかげでフランス語を早く覚えることができたし、書類を作成するときに生じる疑問点を解消したり、衣食住に関連する情報をより簡単に手に入れたりす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なった。
 何より嬉しかったことは、エマニュエル先生やほかの人たちと会話をし、親しくなれたということだ。エマニュエル先生は、私が韓国出身の難民申請者だということを聞いて、おかしな話だと感じたそうだ。同じように、エマニュエル先生だけではなく、115で出会った多くの人たちに韓国から来たことを伝えたら、「北朝鮮から来たのか」と聞き返されたりした。「自分が知っている韓国は豊かな国である」と、私がウソをついていると言った人までいた。
 言葉が通じない国に、知人も正式のビザも無く、難民認定という方法で軍隊の問題を喚起しようとする私に「君は狂っているね」と言うエマニュエル先生に、「よく言われます」なんて返事をしながら、二人で笑いあったものだ。彼女との会話のニュアンスをうまく文章で表せないが、エマニュエル先生は私の意見に共感してくれ、難民申請当時も、そして今でさえも、私を応援してくれている人だ。

-난민신청 당시 만난 엠마뉴엘 선생님

파리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길거리 노숙자로 살 때였다. 한국을 떠나오기 전 최악의 경우 노숙을 할 생각도 했었고 지원단체를 만나게 되기 전까지는 실제로 길이나 공원에서 잠을 잔 적도 있었는데 파리의 여름은 도쿄나 서울과는 사뭇 달랐다.

한국을 떠나오기 전 파리의 날씨와 일교차를 미리 조사했음에도 불구하고 강하게 부는 바람 때문에 의해 체감 온도가 더 낮아 예상보다 추워서 밖에서 잠을 청한 첫날에 조금 당황했다. 거주지가 있는 지금은 파리의 여름이 한국의 여름보다 더 쾌적하지만 노숙하던 당시의 나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괴로웠다. 바람이 안 부는 장소를 잘 찾아 잔다면 어떻게 견뎌낼만하지만 그래도 꽤 춥다는 것, 다 합쳐서 일주일이 채 안 되게 노숙을 한거고 아무리 여름이었긴 하더라도 코트 하나 걸치고 공원벤치나 길거리에서 잔 나도 무모했다. 파리에 처음에 왔을 때 어머니에게 받은 50만원(당시 약 350유로)으로 파리 근교의 한인 민박집에서 2주일 정도 지냈다.

그사이 난민신청을 도와주는 NGO인 FTDA를 찾고 그들이 알기 쉽게 정리해 둔 난민신청의 진행 절차를 읽었다. 난민신청 절차의 단계 중 첫 단계를 위해 필요한 임시주거지를 FTDA로 부터 배정받는데 한 달정도의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알게 되고, 신청 자체가 상당히 더디게 진행되리라 예상됐다. 민박집에서 머물 수 있는 기간이 끝나갈 때 즈음 FTDA가 정 거주지가 없을 경우 연락 해보라는 SAMU Sociale(이하 115)에 115번을 통해 전화를 해 보았다. 이 곳에 전화하면 노숙자, 난민신청자 등 거주지가 없는 사람에게 쉘터를 제공한다. 잠잘 곳을 요구할 때 물어보는 것은 이름, 생년월일, 국적 정도. 체류자격등의 정보는 묻지 않는다. 수많은 신청자가 있기에 매일 아침 일찍 전화를 걸어야 한다. 보통 약 1시간에 걸쳐 긴 대기음으로 나오는 클래식 음악을 들어야(지금도 이 피아노 소리를 들으면 당시의 기억이 떠오른다) 전화 연결이 가능하다.

115가 정말 갈 곳 없는 사람들의 최후의 선택지라는 건 그 곳에 처음 갔을 때 느꼈다. 공간이 넓긴 하지만 2층 침대가 나열 된 방에서 300명이 한 곳에서 자는 탓에 말 다툼 같은 작은 소란도 일어났고 지정된 시간에 오는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등의 불편함 때문에 115의 존재를 알고도 텐트를 치고 숲에서 산다던가 길거리에서 자는 걸 선호하는 노숙자들도 있다.

나는 일 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노동을 하며 난민신청절차를 거치고 싶었다. 난민신청자들에게는 갱신 가능한 1개월 혹은 3개월짜리 임시 체류증이 주어지기는 하지만 취업은 인정되지 않은 관계로 공식적으로 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불법으로 일하다 난민신청에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을 만들고 싶지 않았고 노숙하기에는 바깥이 춥기도 하고 위험해서 115에서 신세를 지기로 했다.

일을 할 수 없고 아는 사람도 없었고, 무엇보다 프랑스에 살려고 왔으니 언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에 하루하루를 프랑스어 공부를 하며 보내던 어느 날, 엠마뉴엘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한 사회복지소에서였는데 당시 엠마뉴엘 선생님은 그 사회복지소의 큰 방을 대여해 난민신청자들에게 일정기간 프랑스어 수업을 할 계획이었고 마침 그 곳에 있던 나는 수업 신청을 했다. 수업을 받는 사람들은 체첸, 이란, 아프가니스탄, 네팔, 방글라데시, 나이지리아 그리고 한국 등의 여러 나라 사람들이었는데 가르치는 사람은 프랑스 사람이다 보니 수업은 프랑스어로 진행되었다. 프랑스어를 전혀 못 하는데 프랑스어로 진행하는 프랑스어 수업이라니..

솔직히 처음엔 많은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한국에서 가져 온 프랑스어 교재와 병행하며 수업을 받다 보니 큰 효과가 있었다. 1~2개월이 지나고 나서는 프랑스어로 대화를 하려고 애썼었고 좀 더 지나서는 서류처리를 하러 다닐 때 프랑스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프랑스어를 빠르게 배우는 것이 가능했고, 서류를 처리하는 데에 있어 의문점을 짚고 넘어가거나 의식주와 관련한 정보들을 좀 더 수월하게 얻는 것이 가능해졌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엠마뉴엘 선생님이나 다른 사람들과 대화가 가능하고 좀 더 친해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엠마뉴엘 선생님이 내가 한국에서 왔는데 난민신청을 한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이상하다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하긴, 엠마뉴엘 선생님 뿐만 아니라 115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에게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북한에서 왔냐’고 되묻긴 했었다. 자신이 아는 남한은 잘 사는 나라라며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언어도 안 되는 나라에 아는 사람도 없이, 제대로 된 비자도 없이 난민인정으로써 한국군대 문제를 환기 시키겠다는 날 보고 “너 미쳤구나”라고 말하는 엠마뉴엘 선생님에게 “많은 사람들이 저보고 미쳤다고 해요”라고 대답하며 서로 웃었다. 그녀가 한 말의 뉘앙스를 글로서 표현하기 힘들지만 내 의견에 공감하고 난민신청 당시에도, 지금도 날 많이 응원 해주시는 분이다.

(翻訳:金 成河/鄭 康烈)

 

  

※コメントは承認制です。
(その2) 難民申請当時に出会ったエマニュエル先生」 に1件のコメント

  1. magazine9 より:

    日本でも「119」ダイヤルがありますが、フランスの「115」はその社会福祉版のようなイメージのようです。シェルターの環境はあまりよくなさそうだとはいえ、どこからでもかけられる番号で、誰もがシェルターを利用できることに驚きました(ついでに、女性用がどうなっているのかも気になります…)。言葉があまり分からないイェダくんでも、無料のシェルターや語学教室にたどり着けるほど、フランスでは支援体制がしっかりしているということなのでしょうか。日本での難民やホームレスへの支援体制との違いがとっても気になります。

←「マガジン9」トップページへ   このページのアタマへ↑

マガジン9

イ・イェダ(LEE Yeada)1991年韓国・仁川生まれ。17歳の頃から韓国社会に疑問を持ち、集会などに時々参加。韓国の専門学校で日本語を学んだ後、2012年、入隊2ヶ月前に単独でフランスに亡命し徴兵拒否。ベーグル職人を経て、現在はフランスでの就学を目指している。パリ郊外に居住

最新10title : イェダりんの“リベルテ”を探して!

Featuring Top 7/7 of イェダりんの“リベルテ”を探して!

マガ9のコンテンツ

カテゴリー